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말 압델 나세르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unnamed (4).png]]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현대 이집트의 국부'''. [[이집트]] 대통령(1956~1970), [[아랍 연합 공화국]] 대통령(1958~1970).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범아랍주의를 추진하며 한 사상에 나세르주의라는 이명이 후렴되게끔 했던 세기의 정치가였다. 나세르 집권기간 이집트는 주변 인접국에 대한 혁명수출국의 반열로 격상됐으며[* 한창때는 아랍 전역과 제3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여 아랍 최고의 라디오 스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인 연설로 이름을 날렸다. 그 때문에 요르단과 예멘에서는 라디오 몰수 조치를 할 정도였다] 그 뒤 이집트는 21세기까지 그런 역할이나 위상을 다시는 갖지 못한다. 즉,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고대~중세의 찬란했던 이집트의 지위와 영광을 일정부분 다시 체험시켜준 인물이다. 또한 대중과의 소통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데다가, 실제로 공교육 보급을 통한 문맹퇴치와 최저임금 인상, 토지개혁. 대규모 토목사업 및 수에즈 운하 수입 확보 등으로 대다수 이집트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느정도 상승했던 시절인지라 이것이 나세르가 이전 국왕이나 이후의 대통령들보다 고평가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1,2,3세계로 분극화된 질서있는 난세에 나세르란 개인의 외교적 기량으로 한 국가의 국제지위에 변동을 주었다는 증거이다.[*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를 계승했지만 정책 전반에서 과격한 급진책으로 급반전하다 암살되고 호스니 무바라크는 그 조율을 잘 이뤄내 나세르처럼 패업을 달성하진 않아도 국정과 외교의 실리를 획득한 끝에 장기집권하였다.] 이집트 북부 지중해 연안 출신으로, 그가 4살 때인 1922년 [[이집트 왕국]]은 법적 독립을 얻었으나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소유'''하는 등 여러 모로 영국에 심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나세르의 친척 중에도 정치적 이유로 구속 수감된 사람이 있었다. 이래저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상흔이 강하게 잔존한 지역에서 안 그런 곳이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유독 나세르는 영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표면상 자신도 반영인사의 필두로 인지됐다. 친소정책, 매진한 아랍 통일과 이집트의 산업화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 및 야당을 탄압했던 역사가 있는 등, 특히 진영논리적인 이유로 서구에서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건 당시도 지금도 개판인 아프리카, 중동, 서아시아의 정세를 기준으로 내려진 평가는 아니다.[* 당시 이집트처럼 아랍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경우 야당은 우익 이슬람 극단주의인 경우가 흔하다. 아랍의 혁명정부들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과 친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반동의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1세계의 말석에 있고 북한의 수교국과는 교류치 않던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평가는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다만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일로 사실 1950년대에는 수에즈 운하 탈환으로 대한민국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으며 박정희도 군인이었을 시절에는 나세르를 존경했다. 다만 이런저런 사유로 꼬이다보니 이집트와 수교가 늦어지면서 나세르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 ] 무바라크 이후 이집트간 관계개선이 이뤄진 뒤 재평가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